조선조 광해군 때 양반들이 권세 다툼을 하던 시절에 그 여파가 전국으로 퍼졌고 시골 호족이나 양반에게도 뿌리가 깊어 다툼이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영남은 퇴계 문하생과 남명 문하생이 대립하고 있어 그 물결이 거세었다.
퇴계 문하생은 벼슬하는 쪽으로 많이 흘렀고 남명의 문하생은 학문 그 자체를 연구하여 지행일치를 근본으로 하였으나 양가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계속되었던 듯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이야이가 옥종면 종화리의 개천보와 안계리의 보를 막은 곳의 고갯길 이야기이다.
시집을 가던 두 꽃가마가 외길이 이곳을 지나다가 서루 마주치게 되었다.
한쪽은 퇴계 문하의 집안이었고 다른 한쪽은 남명 문하의 집안이었다.
좁은 고갯길은 피하기도 곤란하지만 서루 길을 비켜서는 것을 양보하지 않고 버티게 되었다.
그러고는 서로 길을 피하라는 길 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먼저 왔으니 길을 비켜서는 것이 아닌가?” 남명 문하 쪽에서 말했다.
“먼저 왔다면 여기서 마주 칠 이유가 없는 것이니 어서 길을 피하여 주게.”
퇴계 문하쪽도 만만치 않았다. “허허 뒤에 온 사람들이 앞에 가마가 오는 것을 보면 둑길로 오지 않고 섰다가 지나간 후에야 길을 가는 예의쯤 알 것인데 이렇게 고집이니 도대체 무슨 학문을 그렇게 배웠는가?” 남명 문하 쪽의 힐책이 매섭다. “저런,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나?” 퇴계 문하쪽도지지 않는다. 옥신각신하다 그만 한 편의 가마가 못에 빠져 죽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이 곳을 가마고개라고 불렀다.